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London Film Festival] Holy Spider 성스러운 거미 - Ali Abbasi

삶의 잡기 Miscellaneous

by 곡물곡물 2022. 10. 10. 07:38

본문

728x90

성스러운 거미
16명의 여성을 살해하며 자신의 범죄를 언론에 제보한 최악의 연쇄살인마, 일명 `거미` 그를 끝까지 추적하는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스릴러
평점
-
감독
알리 아바시
출연
자르 아미르-에브라히미, 메흐디 바제스타니, 아라쉬 아쉬티아니, 포로우잔 잠시드네자드, 마스바 탈레브, 사라 파칠라트


  • Persian with Eng sub
  • Personal Review: ★★★★☆



//스포가 있습니다.


사우스뱅크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런던 필름 페스티벌의 특별 상영으로 홀리 스파이더 (성스러운 거미)를 보고 왔다.
2000년에서 2001년 이란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은 살인의 동기와 과정, 그 기저에 있는 사회 문화적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려내는 과정이 너무 사실적이라 오히려 건조하게까지 느껴지게 한다.
작품은 실제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스토리 전반에서 잘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극적인 요소들, 미적 구성 따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좀 어리석은 일인지는 몰라도 그것마저도 정갈하다. 영화적인 요소들을 놓치지 않았다. 2시간 동안 끊임없이 긴장이 이어진다. 마치 느슨하게 당겨졌다 돌아오고 당겨졌다가 돌아오는 고무줄을 보는 것처럼 리듬 있는 긴장감이 이어진다. 고무줄이 튕기는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이다.
고무줄이 관객을 때렸는지, 이란의 문화를 때렸는지, 혹은 좀 더 거대한 뭔가를 때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단지 나는 2000년에 일어난 일을 22년 뒤에 영화로 봤고, 지금 이란은 여성 인권을 위한 시위가 한창이다.
나는 히잡을 안 썼다고 10대가 길에서 매일 같이 죽어나가는 세상에 살고, '히잡을 벗을 수 있게 목숨걸고 같이 싸우는 이란 남성들'이란 제목을 건 기사만이 뉴스 헤드가 되는 언어로 산다.

-

내가 간 것은 8일의 첫 날 상영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 감독과 배우들의 간략한 무대 인사와 질의가 있었다.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는 페르시아어가 많이 들렸고, 감독과 배우들이 등장하자 큰 갈채가 있었다.
시놉시스만 간단히 읽고 간 나는 감독이 남자라서 놀랐는데, 나 자신의 편견을 조금 반성했다. 동시에 여자는 춤도 못 추는 이란의 구조를 다시 떠올릴 수 밖에는 없었다.
알리 압바시 감독은 현재의 이란 상황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창작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다.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활동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서 말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위선자가 되지 않으면서, 또한 동시에 활동가가 되지도 않으면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Holy Spider에서 다루고자 했던 많은 레이어들, 문맥의 복합성에 대해서 말한다. 이란은 성적으로 극단적으로 억압된 국가이면서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성적이게 된 국가라고. 해외에서 방문한 사람들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성애화된 것은 처음이라는 감상을 들었다며. 그러면서 그는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16명을 죽인 살인범에 대한 동정심도 없지 않았다 한다. 그는 몇 년동안 이란에서 지속되어온 무의미한, 거의 카프카적인 전쟁의 참전 용사이면서 자신의 살인이 진정으로 신성한 행위라고 믿는다. 쾌락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살인. 남편이자 아버지, 좋은 친구이자 건실한 이웃이었던 것이다. 감독은 이 지점이, 우리가 그를 단순히 사이코패스나 쾌락주의적 살인마라고 단순화할 수 없는 지점이라 한다. '그 사람은 그냥 미친 살인귀야'라는 말로 그를 일반으로부터 잘라 낼 수 없다. 영화 시작 직전에 알리 압바시 감독은 오늘 밤 이것만은 기억해 달라고 하며 이 부분을 다시 설명했다. 이 영화를 보는 여러 분은 다시 생각해 보라, 도대체 이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인범 Saeed의 광기는 결국 우리로부터, 뿌리깊은 미소지니, 이슬라믹 문화로부터, 가부장제로부터, 중앙아시아 문화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그는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사탄이 아니고, 우리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감독과 함께, Rahimi 역의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도 어떻게 이 역을 맡게 됐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처음에 굉장히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데, 무대에 올라가서 인지, 혹은 이란의 현상황을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영화에 캐스팅된 비하인드를 말할 때는 어색하게 수줍어 하던 그가 이 영화가 현재 이란과 어떤 연관성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때는 너무 또렷하게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잔혹하지만, 현재 이란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끔찍하지는 않다. 이 영화를 찍은 사람들이 말한다.
영화가 끝났고, 관객들이 페르시아어로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나는 페르시아어를 모르지만 그들이 뭘 외쳤는지는 안다.

-

이 영화는 약 1년 간 성스러운 도시로 일컬여 지는 Mashhad에서 일어난 16명의 연쇄 살인을 다룬다.
피해자는 모두 여성 성노동자로, 사건이 일어난 뒤 범인이 신문매체에 전화를 해 시체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9명이 죽은 시점에서, 저널리스트인 라히미가 사건 조사에 참여한다.
그는 경찰, 종교 지도자 등을 만나지만 특별한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자체적으로 조사를 이어간다.
그리고 범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광장에서 호객을 하는 사람들을 데려간다는 것을 알아낸다.
라히미의 취재 과정은 감독이 말한 맥락의 복잡성에 자꾸 자꾸 층위를 더한다.
그가 결혼하지 않고, 남편을 대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을 못 준다하다 그가 기자라고 하자 방을 주며 히잡을 제대로 쓰고 다니라 하는 호텔.
가벼운 적대감, 그 다음에는 성적 대상으로 라히미를 대하는 경찰서장의 입에서는 여성 성노동자들은 없어지는 게 좋은 것이 아니냐 하고, 피해자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역겹다는 표현이 나온다.
밤에 호텔로 돌아가는 그를 좇아오는 오토바이, 그가 편집장과 겪었던 성추행과 고발에 대한 추문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남성 동료는 너무나 가벼운 일이 되어 버리는 미소지니의 연속이다.
또다른 주인공 사이드, 그는 건축노동자로 결혼했고 애가 셋이 있다.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을 좀 피곤해 하지만 결국은 딸을 비행기 태워주는 그런 남자. 신실하고, 알라를 섬기는 평범한 그는 아내가 애들이랑 친정에 가면 광장에 가서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목 졸라 죽인다. 전쟁 참여 용사인 그는 신이 자신에게 준 삶의 의미가 단순히 건축자가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성노동자들은 부도덕하고 타락한 여성들이며, 그는 그들을 벌 준다.
라히미는 그 광장에서 분장을 한 뒤 스스로 사이드의 오토바이에 탄다. 극적으로 죽음에서 벗어난 라히미를 통해 범인은 16명을 죽인 채 검거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사이드가 검거되는 순간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게 된다고 본다.
사이드의 아내는 아버지가 왜 잡혀 갔냐고 묻는 아들에게, 걱정할 것이 없다, 알라가 아버지를 지켜줄 것이며, 아버지는 부도덕한 자들을 혼낸 것 뿐이라고 말한다. 동네 주민들은 사이드가 좋은 사람이고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언제든 자신들이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 한다.
재판장 앞에는 사이드의 지지자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16명을 죽이고 체포된 사이드는 법정에서 웃는 얼굴로 농담을 하며 범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라히미는 동료와 이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는다. 피해자의 부모는 어떻게 사이드에게 배상을 요구하고 법정에 나가서 발언하냐고 묻는다. 그것은 자신의 딸이 몸을 팔고 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딸은 살해 당하지 않은 것이 더 낫다.
형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사람을 16명 죽였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안은 테헤란에서 지켜보는 '정치적'인 것으로 형이 줄어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치 사이드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길에 나무를 16그루 벤 것 같다. 길에 웃자라서 불편했던 나무를 치운 것처럼, 근데 어쩌다보니 그 나무가 정치적인 일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극에서 다뤄지는 이란의 성노동자들은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여유가 있었으면 불안한 눈으로 광장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편을 피워 몽롱해진 정신으로 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토대가 있었으면 삶의 불행이 그들을 스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팔고, 그들의 신체를 매대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남성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구조의 사회에서 가장을 잃은 여성은 급격히 자기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면 그는 타락한 자, 신에 누가 되는 자가 되고, 길에서 청소돼야하는 존재, 죽어도 누가 찾지 않은 '것'이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이드가 우리로부터 뚝 잘라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듯, 이 여성들도 갑자기 어디서 떨어진 불행한 자, 어디서 솟아난 타락한 자가 아니다.
사이드는 결국 곤장 100대, 피해자에 대한 배상, 그리고 교수형을 받는다.
결말로 가면서 영화는 이 피의자의 환상인지 아닐지 모르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형을 받고 옥에 있는 사이드에게 친구이자 또 다른 참전 용사인 하지와 판사가 찾아와 사형장에 뒷문을 열어 차를 준비해둘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태형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사이드는 형장에 들어갈 때까지 이 사실을 철썩 같이 믿는다. 하지만 열린 뒷 문으로는 군인들이 들어오고 사이드는 교수형에 처한다. 피해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이 졸려져 괴로워 하면서. 그는 어떻게 된 일이냐 하지에게 그리고 또 신에게 울부짓는다.
영화는 사이드의 아들, 알리를 인터뷰한 영상을 돌려보는 라히미에서 끝난다.
알리는 면회시간에 아버지를 만나 그 여성들을 어떻게 벌 줬는지 물어본다. 잠시 머뭇하던 사이드는 자신의 범행을 아들에게 설명해 준다.
인터뷰에서 알리는, 아버지는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만약 경찰이 성노동자들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자들이 나타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냐고 묻자, 알리는 영상에 대고 자신이 들은 일들을 재현한다.
여성들을 데려와 바닥에 팽개친 것, 목을 조른 것. 목을 발로 밟고 저항하지 못 하게 한 것.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 잠깐 바닥에 누워있으라고 한 뒤 시연한다. 그러고 시체 역할의 여동생을 카펫으로 감싼다.
동생은 천진하게 '나 죽었어!' 하고 웃고, 영화는 끝난다.
-
영화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이해된다. 살인도, 사건이 해결된 방식도, 그 배경도 문맥도.
하지만 종교적 극단주의의 사회구조, 정치적 입김, 일등 시민 남성, 복속된 여성, 어디선가 왔고 어디로 되물림되는 미소지니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너무 예상했듯 흘러가고, 뭐 하나 꼬집어 고칠 수 없는 이 복합적인 상태를 너무 잘 알겠는 것은 비극이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이 복합성 안에서 살아온 나와 우리의 비극.
이 영화를 보고 이란의, 이슬람 문화의, 중앙 아시아의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정말로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다.
피해자를 탓하는 것은 영화의 일이 아니고 이란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살인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그러게 왜 그런 일을 해서', ' 술집에서 일하니까 그렇지' 따위의 문장은 너무 익숙하다. 어떤 여성임을 일반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일. 그것은 그들을 분리해 내는 일이 아니고 (분리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짧은 치마를 입으니까', '노출이 심한 옷을..', '밤 늦게 다니니까', '남자들이랑 술을 마시니까', '여자 혼자 다니니까', 따위로 우리에서 우리를 떨어뜨려 내는 것일 뿐이다.
결국 인간에서 인간을 구분짓고 나와 다른 덩어리로 분리하는 것 자체가 극단주의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제를 하나의 극단주의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간 행동일까?
불행히도 아직 나는 가부장제가 아닌 사회를 살아본 적이 없다. 가부장제를 벗어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다른 형태의 사회와 비교를 해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가정을 철회할 수도 없다.


728x90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